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기민한 작전 변경 === 원래 작전상으로 리틀 보이는 기폭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기체에 싣고 이륙하도록 되어있었다. 일단 리틀 보이는 우라늄 기반의 원자폭탄이며, 우라늄이 물에 들어가면 물의 감속재, 반사재로서의 작용으로 인해 임계질량보다 작은 질량으로도 연쇄반응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리틀 보이는 포신형 폭탄이었으므로 추락 과정에서 포신 내에서 우라늄 발사체가 흘러내려 '자동 조립'될 위험성도 있었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 추락하게 된다면 임계사고를 막기 위해 폭탄을 분해해 뿔뿔이 흩어놓도록 지침이 내려져 있었지만, 지시한 사람도 그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리틀 보이도 4.5톤으로 B-29의 적재 한계인 9톤의 반이나 달할 정도로 매우 무거웠으며, 일본까지의 왕복 비행을 위해 연료를 만재해야 했으므로 이륙 중량을 초과할 정도였다. 또한 주둔지의 지질 때문에 활주로 노면 상태도 엉망이었으므로 이륙이 지극히 불안정했다. 자칫 이륙하다 추락하면 끝장이었다. 게다가 원자폭탄이 유폭할 경우 해당 비행장과 부대원 전원, 좀 넓게 잡으면 섬 전체가 원자폭탄의 첫 희생자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Captain_parsons.jpg]] 이런 이유로 인해 폭탄 관리 담당장교[* 작전의 전체 지휘는 제509 혼성 전대의 티비츠 대령이 했지만, 실제 폭탄의 관리는 그의 소관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William_Sterling_Parsons|윌리엄 파슨스(William S. "Deak" Parsons)]] [[미합중국 해군]] 대령은[* 1922년 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생으로 바로 [[하이먼 리코버]] 제독과 동기이며, 초급 장교 시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 경력을 해군 병기장교로서 종사해 [[VT신관]] 개발과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제독 진급에 필수 조건이었던 주력함의 함장 직책을 1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지만, 원폭 투하 직후 그는 임시 준장으로 진급했고 전후 46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은 이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당초 작전을 변경하여 '''__조립__ → 탑재 → 이륙 → 투하''' 순서를 '''탑재 → 이륙 → __조립__ → 투하''' 순서로 바꾸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만약 원자폭탄을 탑재한 B-29가 이륙하다 추락하더라도 최소한 원자폭탄이 유폭되는 것은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자폭탄의 조립이 평시에도 매우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이걸 쉴 새 없이 흔들리고 프로펠러의 굉음이 몰아치며 발 딛고 서있기도 어려운 B-29 폭탄창에서 해보겠다는 이야기. 참고로 파슨스 대령은 미 해군에서 손 꼽히는 병기 전문가였으며, 특히 탄도학 전문가로 명성을 날렸다. 파슨스 대령은 저 유명한 [[VT 신관]]의 개발 책임자 중 한 명이며,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초기부터 참여했고, 맨해튼 프로젝트 총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파슨스 대령이 상부로부터 어느 정도의 신뢰를 받았냐면, 그로브스 장군이 원자폭탄 투하 작전 감독을 위해 티니안 기지에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Farrell_(general)|토마스 패럴(Thomas F. Farrell)]] 육군 준장을 파견하면서 "파슨스를 전사하게 내버려 두지 마. 우리는 그가 필요해!(Don't let Parsons get killed. We need him!)"라고 따로 신신당부를 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원자폭탄 중 포신형 폭탄인 리틀 보이의 '포신'을 설계한 사람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원자폭탄 개발에서부터 실제 투하 작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주도한 [[맨해튼 계획]]의 핵심 중 핵심인 인물이다. [[트리니티(핵실험)|트리니티 핵실험]] 때도 직접 B-29에 타고 상공에서 폭발 현장을 관측하고 있었다. 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찰스 B. 맥베이 3세 대령을 만나 리틀 보이에 장착될 우라늄 코어(물론 맥베이 함장은 이게 뭔지 몰랐다)를 적재하도록 하고, 이를 티니안 섬까지 수송하도록 명령을 전달한 것도 파슨스 대령이다.[* 여담으로 이때 파슨스 대령은 맥베이 함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1) 티니안 섬까지 최고 속도로 달릴 것 2) 화물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말 것 3) 배가 침몰해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화물부터 구할 것(함장을 포함해 전 승무원의 생명보다 화물이 우선이라는 얘기를 했다는 설도 있음) 4) 당신이 항해 일자를 단축할수록 이 전쟁도 단축됨.] 파슨스 대령은 독단적으로 작전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이 계획을 직속 상관인 토마스 패럴 육군 준장에게 보고하였다. 물론 에놀라 게이를 조종할 폴 티비츠 대령에게도 당연히 알렸다. 패럴 준장은 폭탄을 이런 식으로 조립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한 파슨스 대령의 대답은 이러했다.[* 스티븐 워커, 위의 책, pp. 236~237.] >'''"없습니다. 하지만 [[I Can Do This All Day|온종일이라도 시도해 볼 참]]입니다."''' 여기에서 약간의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그로브스 소장은 깐깐하고 비타협적인 그의 성격대로, 티니안 섬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 대해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고 처리하도록 지침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슨스 대령은 현지 책임자인 패럴 준장에게는 보고했으나 맨해튼에 있던 그로브스 소장에게는 이를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하단에도 언급되어 있는 '파슨스 대령의 명령불복종 및 무단 작전변경 설'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브스 소장은 나중에 "내가 그때 보고를 받았더라도 그러한 작전 변경을 당연히 승인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파슨스 대령을 두둔했다. 어찌되었든 패럴 준장은 작전 변경을 승인했으며, 파슨스 대령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는 총 11단계나 되는 원자폭탄 조립 과정을 수십 번이나 반복 연습했다. 처음에는 원자폭탄 보관실에서 연습했고, 원자폭탄이 에놀라 게이에 탑재된 이후에는 그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B-29 폭탄창 내부에 들어앉아 원자폭탄 조립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파슨스는 오후 늦게까지 연습을 거듭하다 공구에 손을 다쳐 피를 흘렸다. 이것을 보고 놀란 패럴 장군이 돼지 가죽으로 만든 좋은 장갑이 있다면서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파슨스는 "맨손으로 감을 잡아야 합니다."라며 그것을 거절하고 연습을 계속했다. 이것은 파슨스가 괜히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한국]] 밀리터리 계에는 파슨스 대령이 상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무단으로 원자폭탄 조립과 기폭 순서를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으나, 이는 일본 측에서 원자폭탄 작전을 비난하기 위해 날조한 것이 그대로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서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이러한 견해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여러 문헌들[* 원자폭탄 만들기(사이언스 북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황금가지),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뿌리와 이파리) 등에 나온다.]을 통해 완벽히 부정되었다.[* 아마도 최고책임자인 그로브스 소장에게 직접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러한 낭설의 원인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는 원자폭탄의 현장 책임자로서 상관에게 보고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기민하게 작전을 변경한 것이며, '''그의 책임감이 결국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를 완벽한 성공으로 이끌었다.''' 한국에 번역된 문헌에는 종종 윌리엄 파슨스 '대위'로 적혀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번역자들이 'captain' 계급이 미국 육군에서는 대위이지만 미국 해군에서는 대령을 의미하는 것을 모르는데서 오는 오해이다. 윌리엄 파슨스는 히로시마 작전 당시 대령이었으며 전후 준장-소장까지 승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